전북 기독교. 천주교. 불교. 원불교 성지 연결 전주-익산-완주-진안 잇는 180㎞ 순례길 조성
순례라는 말에는 영성(靈性)이 깃들어 있다. 헤진 가사(袈裟)를 걸치고 먼 길을 걸어 성스러운 곳을 향해 가는 순례는 스스로
불러들인 고난과 다를 바 없다. 순례는 말하자면 거룩한 고행이다.
전북지역에 산재한 4대 종교의 성지를 걸어서 여행할 수 있는 순례길이 만들어진
다. 전북도와 사단법인 한국순례문화연구원은 천주교와 기독교, 불교, 원불교 등 4대
종교의 성지가 있는 전주~완주~익산~진안을 잇는 180㎞의 '아름다운 순례길'을
조성한다.
스페인에 예수의 제자 야곱의 무덤을 찾아 떠나는 '카미노 데 산티아고' 800㎞ 순례
길이 있다면 전북에는 '아름다운 순례길'이 생기는 것.
순례자의 마음으로 이 길을 자동차로 먼저 둘러봤다. 28일 처음으로 간 곳은 호남 천주교의 발상지인 완주군의 초남이 성지. 전북은 숱한 순교자를 낸 '순교의 땅'으로 명성이 높지만 그 가운데서도 동정부부
유중철, 이순이는 '순교자의 꽃'으로 회자한다. 초남이 성지는 이들 부부가 살았던
장소다.
신앙심이 두터운 가정에서 자라난 두 사람은 중국인 신부 주문모에 의해 동정부부
로 연을 맺었지만 결혼 4년째인 1801년 신유박해 때 처형됐다. 초남이는 조정에 의해 헐려 그 터에는 작은 웅덩이 하나가 남아 있다. 웅덩이 옆에는 "순교자들의 피와 땀으로 십자가의 신비를 드러내시는 하느님 아버
지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로 시작되는 시복 시성 기도문이 적혀 있다. 모진 박해로부터 천주교를 지켜낸 순교자들의 정신적 뿌리를 엿볼 수 있었다. 또 지극한 사랑으로 동정부부 생활을 굳건하게 실천한 이들 부부의 삶은 가정의 의
미와 정체성을 깨닫게 한다.
다음 목적지는 익산시 금마면의 미륵사지. 눈이 시릴 정도로 청명한 가을하늘 아래 자리를 잡은 미륵사지는 불교 성지 답게 고
적하다. 6만6천㎡의 드넓은 절터에 보이는 것은 동쪽의 9층 석탑과 서쪽의 석탑을 둘러싼
덧집 뿐. 이 덧집 안에서는 미륵사지 석탑의 보수정비 작업이 한창 진행 중이다. 백제 무왕 때(600~641년 재위) 세워졌다는 높이 14.2m, 사방 길이 12.8m의 이 석탑
은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석조 건축물이다.
9층이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17세기 이전에 붕괴해 1915년 일본인들이 무너진 부위
를 콘크리트로 보강해 놓았다.
현재 해체작업을 끝내 동탑만이 위용을 드러내고 있다. 무왕이 쇠락하는 백제의 부흥을 꿈꾸며 세웠다는 미륵사 석탑의 웅장한 모습은
2014년이나 볼 수 있다. 세번째 목적지는 한옥성당으로 유명한 익산 망성면의 나바위 성당. 한국 최초의 신부인 김대건 신부가 1845년 사제 서품을 받고 중국에서 귀국하면서
첫발을 디딘 곳으로 사적 제318호로 지정돼 있다. 프랑스인 베르모델 신부가 12칸짜리 기와집을 인수해 1906년 건물을 완공했다. 웅장한 전면에는 바실리카식 첨탑을 세웠지만 몸체는 팔작지붕에 기와를 얹은 한
옥이다. 살짝 들여다본 성당 안에서는 한 노수녀가 기도를 하고 있었다. 그에게 믿음이란 무엇일까. 신에 대한 믿음의 깊이는 어디서 오는 걸까. 묻고 싶었
지만 끝내 입을 떼지 못하고 눈인사로 작별을 대신했다.
두 손이 굳고 혀가 닳도록 기도하던 그 절절함. 고단한 종교인의 길을 엿보는 것으
로 만족했다.
다음 순서는 진안 성수면의 원불교 만덕산훈련원. 이곳은 원불교를 연 박중빈 대종사가 제자들에게 처음으로 선(禪) 훈련을 했던 초
선 터 아래 세워진 도량이다.
훈련생들은 오전 일찍 좌선과 선체조로 아침을 연 뒤 '일원상(一圓相)의 진리'를 깨
닫기 위해 산으로 올라갔다고 한다.
원불교는 '교조(敎祖.종교의 창시자)' 신앙이 아니라 진리 자체를 신봉하기에 화합
과 다양성이 가능하다는 훈련원 집사의 설명이 진중하다.
1916년 생겨난 원불교가 짧은 세월, 괄목할만한 성장을 서둔 민족종교로 성장한 원
동력은 바로 다양성을 바탕으로 한 일원상의 진리 때문인 듯 했다. 순례길은 이 밖에도 1866년 병인박해 때 희생된 순교자 10여명이 묻힌 완주군 비봉
면의 천주교 천호성지, 신라 말기에 창건한 완주군 소양면의 송광사, 호남 최초로
1893년 설립한 전주시 다가동의 서문교회 등으로 이어진다.
또 순례기 중간마다 가람 이병기 생가, 전주 한옥마을의 강암 송성용기념관과 최명
희문학관, 완주 고산천 숲속 오솔길 등을 만날 수 있다.
비록 하루 동안의 짧은 순례길이었지만 숨이 턱까지 차오르며 걷는 동안 구도자와
여행자를 만났고 그 만남 속에서 종교의 의미를 생각해 봤다.
한국순례문화연구원 김수곤 이사장은 "'아름다운 순례길'은 4대 종단의 유산과 함
께 전북지역의 역사와 문화 자산을 보고 느끼는 길이 될 것"이라며 "속도전에 지친
이들이 순례길을 걸으며 자신을 돌아보는 기쁨과 느림의 미학의 느껴보기를 기대
한다"고 말했다.
4대 종단은 오는 31일 종단 관계자와 신도 등 2천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전주 경기
전 앞에서 '아름다운 순례길' 선포식을 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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